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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께,

구청에 갔다. 신문에서 강좌 일정을 보았는데, 주제가 흥미롭기도 하고 시간에 맞춰 갈 수 있어서 참석해보았다. 


16세기 조선의 호남에 대한 이야기였다. 시작에 앞서, 허균의 말이 인용되었다.
“정릉(靖陵 중종의 능호)조에는 호남 출신의 인재로서 드러난 자가 매우 많았다. 박눌재(朴訥齋 눌재는 박상(朴祥)의 호) 형제ㆍ사인(舍人) 최산두(崔山斗)ㆍ미암(眉庵) 형제ㆍ교리(校理) 양팽손(梁彭孫)ㆍ제학(提學) 나세찬(羅世纘)ㆍ목사 임형수(林亨秀)ㆍ김하서(金河西)ㆍ임석천(林石川)ㆍ삼재(三宰) 송순(宋純)ㆍ찬성(贊成) 오겸(吳㻩) 같은 사람은 그중 가장 두드러진 이들이다. 그 후로도 박사암(朴思庵 사암은 박순(朴淳)의 호)ㆍ이일재(李一齋 일재는 이항(李恒)의 호)ㆍ양송천(梁松川 송천은 양응정(梁應鼎)의 호)ㆍ기고봉(奇高峯 고봉은 기대승(奇大升)의 호)ㆍ고제봉(高霽峯 제봉은 고경명(高敬命)의 호 )이 학문이나 문장으로 세상에 알려졌는데, 지금에 이르러서는 재행(才行)으로 당대에 드러난 이가 한 사람도 없다. 뿐만 아니라 과거에 급제하는 것도 차츰 적어져가니 그 원인을 모르겠다.”

- 성소부부고 제 23권 설부(說部) 2, 성옹지소록 중(惺翁識小錄中) ; 거기서 보았던 단어 몇 개를 기억해내어 한국고전종합DB에서 가져왔다.
강연자는 인재가 많았던 호남의 16세기를 마치 서양의 르네상스 시대 같다고 했다.

연산군 때, 유배 차 오게 된 (유능한) 사람들이나, 정치계 쪽에 있다가 어떤 위험(?)을 인지하고 처가로 (도망가듯) 이동하게 된 사람들로 호남지역에 타향 출신의 인재들이 처음 유입이 되었으며, 그들이 호남 지역의 사람들과 혼인을 하거나 그들로부터 배움을 통해 새로운 인재들이 태어나게 된 것이라고 하였다. 인맥과 혼맥(?)으로 이어져 그들은 자주 교류하였으며 그것이 호남 문화의 황금기를 만들어냈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시기 이후로 인재가 없게 된, 허균이 당시에 몰랐던(?ㅋㅋ) 이유를 세 가지나 말해주었다. ①당을 나눠 정권을 다투던 분위기를 따라(?) 호남에서도 당을 갈라선 사람들끼리 서로를 헐뜯으며 그들끼리의 교류가 점차 줄어들고, 그 이후로 ②임진왜란과 ③정유대란의 두 번의 큰 전쟁을 치르게 되면서 유능한 인재를 많이 잃었다는 것이다. 강연자는 첫 번째 이유에 조금 더 강조하는 듯 했다.

16세기 호남처럼 (르네상스같은) 문화를 부흥하기 위해서 다른 지역 인재들의 자발적인 유입이 필요한데 21세기 광주가 다른 지역 인재들을 매혹시킬 수 있는 대표적 거점들로는 문화전당과 비엔날레를 들 수 있지만 문화의 뿌리나 토대라 할 수 있는 ‘학문’의 거점이 현재로서는 찾기 어려운 것 같다는 말로 강연을 마무리 하였다.

좀 더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달에 예정되어있는 강연회에서 마저 하겠다는데, 그 때에는 참석이 어려울 것 같다.

강연회 이후로 계속해서 ‘학문’의 거점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다. 시민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학문’의 거점이란 어떤 것일까? 대학교인가? 도서관인가? 학당일까?

요즘은 <플라톤의 『향연』 입문> 을 읽고 있다. '토마스 L. 쿡시 ; Thomas L. Cooksey'가 쓰고 김영균이 옮겼다. 얇고 제법 작은 책인데 한동안 책을 놓고 있었던 탓에 문장이 익숙치 않아서인지, 아니면 책의 내용이 어려운 건지 가늠할 수 없지만 네 달, 아닌가 여섯 달? 정도 되었는데 이제 절반 정도 읽은 것 같다. 디오티마 이야기가 나오는 부분 읽고 있다.

여기에 쓰이지 않은 나날동안 만든, 아니 만들고 있는(싶은) 습관 중에 하나가 플라톤에 관련한 논문 모으기인데 오늘에서야 인근 대학교 교수님의 논문을 찾아보았다. 아마도 언젠가 찾아봤던 것 같기도 한데, 운이 좋게도, 내가 한번은 읽었던 <파이드로스>와 관련한 논문이 있었다. 94년도 논문인데 제목에 한자가 있어서, 읽어볼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것 같다. 내친김에 읽는다.


플라톤의 〈파이드로스〉篇에서의 文字批判


아, 그리고 인용된 허균의 말을 찾아내서 읽어보니 인용된 것이 한 문단 전체가 아니었다. 강연자가 인용하지 않았던 나머지 문장을 덧붙인다.

“나는 여러 해 동안 호남을 출입하면서 그 풍습을 보았는데, 대체로 후생을 교도(敎導 ; 가르쳐서 이끎)하여 이끌어 주는 큰 선생이 없는데다 사람들의 품성 또한 모두 경박하고 잘난 체해서 남에게 굽히기를 싫어하였다. 게다가 의식(衣食)의 자원이 넉넉하기 때문에 모두들 목전(;눈앞)의 이익에만 매달리느라 앞일을 계획하는 자가 없다. 이 세 가지가 학문을 하지 않는 빌미가 되었으니, 탄식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