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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책읽기


김현의 책을 송정도서관에서 빌려왔다. <잉여의 미학>을 읽고 있는 도중인데 반납 기한이 다 되어 다시 빌리려고 도서관에 갔다가 겸사겸사 빌려온 것이다. 애초에 김현이라는 사람은 내가 스스로 아는 사람이 아니었다. 여기저기 관심가는 것들 사이를 떠돌아 다니다니며 주워 듣다보니 익숙해진 이름이다.
트위터나 다른 SNS를 통해 여러 사람들이 좋아해서 나 또한 좋아하게 된 신형철, 그에 대해서 알아보다가 '제 2의 김현'이라는 수식어에서 이름을 주웠고, 황현산 선생님께서 트위터를 시작하시게 되면서 선생님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따라 나 또한 좋아하다보니 그 근처를 어슬렁거리다가 그의 이름을 많이 주웠다. 작년, 어느 시인이 추천 해준 <구토>를 읽으며 사르트르에 관심을 갖다가 <어린왕자>의 생텍쥐페리가 얽혀들면서 실존주의에 관심을 갖게 되자 고등학교 동창이 박정자를 알려줬다. 그렇게 1여년이 지나 도서관 신간코너에서 <잉여의 미학>을 집어들어 읽게 되었다. <잉여의 미학>에는 직접적으로 '김현'이 언급되지는 않지만 책을 읽으면서 모르는 것들에 대해 검색 할 수록 '김현'이라는 이름이 주변에서 얼쩡거렸다. 그래서 내친김에 빌려왔다. 15일의 일이다.

<행복한책읽기>는 김현이 1986년부터 1989년 사이에 쓴 일기를 엮은 것이다. 일기! 행복한 책 일기.
어제는 잠을 자려고 펼쳤다가 밤을 꼬박 세워 읽었다. 나에게는 낯설은 작품들에 대한 설명이나 감상으로 가득해서 금방 지쳐 나자빠지겠지 했는데, 묘하게 깃들어 있는 긴장감이 잠을 몰아낸 것이다.
말투가 재미있다. 담담하고 단정한데 깊다. 울림이 있다. 읽힌다.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있어서 다시 보거나 옮겨 적어두려고 접어둔 페이지가 1988년 후반부터 1여년은 서너페이지를 남기고 모두 접혀버려 난감해졌다. 다시 읽어야할 듯 싶다. 이왕이면 낙서도 하고 싶다.

그리고
생일 축하 선물


8.3
때로 타인들의 문장 속에서 내 이름을 발견했을 때의 당혹감은 꼭 무엇을 훔치다가 들킨 어린 아이의 심정이다. 원재훈의 「20세기가 간다」(『시운동·시힘 동인 합동 신작 시집』,문음사, 1989)를 읽었을 때의 마음의 움직임이 바로 그것이다.

석가모니가 예수가 간다
김소월이 백석의 부축을 받으며 진달래 동산으로 가고
김수영이 신동엽과 함께 피흘리며 풀 속으로 가고
미당이 말당과 더불어 질마재 넘어가고
고은이 머리 빡빡 깎고 산속으로 울며 간다
그걸 물끄러미 바라보는 김현은 책을 읽으며 아예 책 속으로 들어간다
쫄랑쫄랑 아이들을 데리고 간다
모두들 간다 이제 돌아온다라는 낱말은 만국어사전에서 사라졌다
여기에서 내가 운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이제 고전이란 나에게 무엇인가? [77]

흥미 있는 것은 시인 명단에 신경림·황동규·정현종·김지하 등의 이름이 빠져 있다는 것이고, 나는 골목대장쯤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거명된 이름들도 되돌아오지는 않는다. 그들은 가버린 사람들이다. 가버린 사람들의 작품을 고전이라 한다면, 그것이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읽히지 않는 고전이 되어버린 사람이 되어버린 허망함은 누구에게 가서 하소연하나. 생각할수록 끔찍하다.
그 동인지에서 다른 시들을 만나지 못한 것은 서운하다. 그것도 끔찍하다.


읽히지 않는 고전이 되어버린 사람이 나에게 와서 하소연을 한다. 슬프다, 허망하다, 서운하다, 끔찍하다
책을 덮고 다시 보니 낙서같은 그림, 어깨에 아빠 얼굴이라고 씌여있다.

초저녁의 꿈


초저녁 잠의 꿈이다.
고등학교 졸업식날 우연히 마주쳤다가, 작가의 길을 포기 말라고 덕담을 주신 젊은 문학선생님이 주인공이었다. 관점이 1인칭 주인공인지, 전지적 작가인지 헷갈린다.

10층 높이 정도되는 건물의 옥상에 올라와 있었다. 아득한 지면을 불안한 시선으로 번갈아 보았다. 뛰어내릴 작정이었다. 몇몇의 사람들이 같이 옥상에 올라와서 침착하게 말렸다. 다급하게 누군가 올라와서 말을 무어라고 했다. 뛰어 내릴려던 그 원인이 해결되었다는 이야기로 들렸다. 그러나 고집은 완고했고 신경질적으로 쏘아 붙이며 소리쳤다. 그러고는 아주 겁에 질리고 불안한채로 뛰어내렸다. 3층 정도 밑은 테라스였는데, 바깥으로 기다란 막대기가 게양대처럼 나와있었다. 거기에 윗옷이 걸렸고 정신을 잃었다. 눈을 뜨니 병실이었다. 옆에 있던 사람은 옥상에 같이 있던 사람 중 한 명으로 가장 앞자리에서 차분이 말리던 중후한 남자였다. 말수가 적고 무뚝뚝하게 보였는데, 밤새 옆에서 간호하였던 듯이 지쳐보였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할 일이 있다며 바깥으로 나갔다. 나가려는 그를 말리는 듯 일어섰다가 앉아있던 의자에 다시 앉고 잠시 후, 시선은 옷걸이로 향했다. 옷걸이에는 그가 사고 당시 입었던 옷이 걸려 있었다. 바지에 흥건히 묻은 피, "하혈을 했어."

그러자 내가 말했네. '좋습니다, 부인. 훌륭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에로스가 그런 자라면 인간들에게 무슨 쓸모가 있나요?'
플라톤, <향연> 강철웅역 204d~212b 이제이북스


이 부분은 몇 번을 읽어도 이해가 가지 않던 부분이었다. 초저녁 꿈에서 막 깬 다음에 아무래도 '하혈'이라는 단어가 걸려 이것저것 찾아보다가 아주 1여년 정도 읽지 않았던 <향연>을 다시 펼쳐 읽는다. 오래 전부터 앓아온 숙제를 풀 날이 머지 않은 듯 보인다.

"너 향연 언제 읽었어? 고등학교 다닐 때?"
"안 읽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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